옹기종기 모여 앉아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초가지붕들이 추억처럼 멀리 보인다. 어미소가 하품을 하는 듯 "엄매"하고 우는 게으른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고, 초가지붕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에서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느라 타는 솔가지 냄새가 나는 듯 하다.
잿빛을 띄고 있는 지붕. 지붕을 침대 삼고 멍석을 요 삼아 가을볕에 일광욕을 즐기는 듯 온 몸을 내맡기고 누워 있는 빨간 고추, 석양에 지붕 위에서 원무를 추고 있는 고추잠자리 떼, 여기에다 박 덩굴과 박 잎사귀의 녹색은 가히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이 되고 한편의 시가 된다. 고추잠자리 날개 위에는 동심이 떠다니고,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와 탐스러운 이마를 쑤욱 내밀고 여물어 가고 있는 박에는 정성들여 가꾼 농심이 담겨져 있고, 달밤에 활짝 피어 있는 박꽃에는 자연의 미소가 눈짓한다.
가을과 초가지붕 그리고 그 풍경들. 그 풍경들을 한층 인상 깊게 북돋아 주는 빨간 고추 또 거기에다 박이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박 덩굴괴 지붕 위 잠자리 떼의 원무-그것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가을의 운치요, 정취며, 서정이다.
그런데 이제는 기차 여행을 하면서 보고 또 보아도 지난 시절의 그 정경들을 볼래야 볼 수가 없다.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나 양철, 기와등으로 세대교체 된지 오래고, 또 지붕 위의 박도 나일론 바가지나 PVC 바가지에 밀려 퇴물 신세가 되어 문자 그대로 "쪽박 찬" 꼴이 되고 만지도 오래다. 지붕 위의 고추도 볼 수 없고 하물며 농약 탓에 고추잠자리 떼의 원무도 볼 수 없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잠자리를 잡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흘레 붙어라, 흘레 붙어라 "라고 주문처럼 외쳤던 그 말들이 꿈결인양 느껴지고 또 그 시절 어서 커서 약 오른 빨간 어른 고추가 되길 바랐던 풋고추 소년이었던 내가 어느새 귀밑에 흰서리가 무심히도 내리고 있구나 싶으니 적막도 하다.
그래, 문명과 세월은 산문을 가져다 주고 대신 시를 앗아 갔구나! 나는 지금 내 유소년 시절의 가을을 생각하며 초가지붕의 그 서정을 못내 그리워 해 본다. - 이 유 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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