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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물든 감처럼 - 양문규

용재천사 - Ailes d'ange 2011. 3. 2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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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물든 감처럼



 영동은 감고을이다. 어디를 가도 감나무가 즐비하다. 집안은 물론 논과 밭둑가, 비탈진 언덕, 험한 산에도 온통 감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다. 심지어 읍내를 비롯한 주변 도로의 가로수도 감나무다. 읍내에서 멀리 떨어진 고향집에도 큰 감나무가 버티고 있었다.

 

 감나무는 봄날 가장 늦게 꽃을 피운다. 다른 과수들이 먼저 꽃을 달고 나중에 잎을 다는 것과는 달리 먼저 잎을 달고 나중에 꽃을 단다. 감나무는 노랑연두 잎을 틔우고 하얀 꽃을 피우는 봄날부터 하얀 눈 속에 까치밥으로 남는 겨울까지 우리네 인정의 그리움을 다 보여준다. 빗방울소리 묵직하고 주먹만 한 땡감이 떨어지는 여름과 홍시를 주렁주렁 달고 이파리도 알록달록 함께 물들어가는 가을날은 또 어떠한가. 지금도 감나무만 바라보면 고향을 읽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하다.

 

 향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친 후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고향을 떠났지만 단 한 번도 마음으로부터 감나무를 비운 적이 없었다. 그 속에 고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초겨울, 기차를 타고 밤늦은 시간 영동역에 내린 적이 있다. 초겨울인데도 제법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만산홍엽을 지나 추운 겨울로 가는 계절, 하얀 눈을 맞는 행운이라니. 그 황홀함으로 탄성을 지를 때 불빛처럼,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붉은 감이 보였다.

 

 그토록 오랫동안 보아왔던 감이었는데 그 풍경은 새로운 정서로 나를 감동시켰다. 청년으로 들어서는 마음의 변화 때문이었을까. 첫눈에 더욱 선명하던 붉게 붉게 물든 감은 아련하게 가슴에 들어와 한참이나 나의 발걸음을 감나무 곁에 매달아 놓았다.

 

 일찍이 김남주 시인은 감나무에게서 “찬서리/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조선의 마음”(「옛 마을을 지나며」)을 읽어냈다. 영동의 감나무는 그렇게 삶의 한가운데에서 그 가치를 온전히 지켜내고 있다.


- 양 문 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