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벚나무꽃은 제 향기에 취했는지 제가 만든 꽃그늘에 취했는지 새로 돋아난 어린 이파리의 목까지 벌겋게 상기되어 있는 게 보입니다. 산벚나무 꽃가지를 잡고 얼굴을 가까이 대니 볼과 콧등과 입술을 스치는 꽃잎의 손길이 간지럽습니다. 꽃잎도 내가 느끼는 이 짜릿한 감정을 같이 느끼고 있을까요. 꽃 속에서 잉잉대는 벌과 벌레들 날갯짓 하는 소리에 섞여 나도 꽃의 속살에 코를 박습니다. 가슴에서 꿀벌 닝닝대는 소리가 납니다.
산벚나무 꽃을 가슴에 안아봅니다. 그러나 팔 안에 담기는 향기의 적막한 공간.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의 가운데는 비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꽃과의 거리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주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꽃을 사랑하는 동안 꽃잎은 찢어져 뭉개지고 꽃가지는 꺾인 채 내 손에 들려 있게 되겠지요. 꽃을 사랑하여 꽃이 제 깊은 곳에서 내어준 꿀까지 가져가되 꽃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 벌처럼 사랑하고 싶습니다. 나비처럼 사랑하고 싶습니다. 꽃은 꽃대로 향기롭고 나비는 나비대로 아름다운 사랑. 혼자 있어도 아름답고 함께 있어도 아름다운 사랑 그런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내 앞에 만개한 산벚나무꽃, 산벚나무꽃 앞에 혼자 있는 나. 그리고 화사함으로 사방을 가득 채운 빛과 텅 빈 고요. 이것도 색즉공(色卽空)은 아닐까 생각하다 엊그제 읽은 이기철 시인의 시를 떠올립니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보렴 /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 더 걸어야 닿는 집도 /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보렴 (이기철「벚꽃그늘에 앉아보렴」)
두근거리는 나를 들킨 듯도 싶습니다. 두근거림을, 두근거리며 살아가는 생을 벗어놓아 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것은 곧 그리움과 사랑을 벗어놓는 길이요 서러움도 미움도 벗어놓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벗을 수 있어야 진정으로 알몸이라고 말합니다. 집에 이르기 위해서,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 지치도록 걸어야 하는 생의 길, 부서져야 하는 삶, 거기서오는 초조함과 적금통장까지 다 벗을 수 있어야 비로소 알몸이라고 합니다. 알몸의 정신으로 청정해져 보라고 합니다. 벚꽃 그늘에서 다만 사랑의 두근거림으로 출렁거리지 말고 알몸으로 청정해져 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낄 줄 모르면 그는 이미 죽음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이상으로 끌어올려 아름다워진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바꿀 줄 알 때 사랑은 더욱 깊어집니다. 텅 비워 청정해진 공간에 선함과 다디단 향기가 채우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봄기운. 거기서 비로소 공즉색(空卽色)입니다.
천지 가득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아름다워진 마음이 착한 마음으로 옮아가는 일이 어찌 쉽게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러나 그걸 깨달아 알고 소리 없이 웃는 이를 위해 꽃비가 내리는 거라고 말합니다. 우화동지. 헤아릴 수 없는 꽃비가 하늘에서 내리고 그로 인해 땅이 흔들리면서 크게 깨달은 이를 찬탄했다는 그 꽃비가 내립니다. 그런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한다 해도 아름다움이 우리 마음을 녹여 천천히 선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조팝나무 진한 향기 아래 누워 있습니다. 앵두꽃 복숭아꽃 산벚나무꽃 환장하게 아름다운 꽃그늘 아래 혼자 누워 있습니다. - 도 종 환 - |
'▶ 수필(隨筆) 모음 > 수필 모음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마음의 톱밥난로 - 이정하 (0) | 2011.03.30 |
---|---|
겨울 정원에서 - 류달영 (0) | 2011.03.29 |
꽃밭을 가꾸는 마음 - 최원현 (0) | 2011.03.27 |
가난한 날의 행복 (0) | 2011.03.27 |
국물이야기 (0) | 2011.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