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隨筆) 모음/수필 모음 4

올해도 봉숭아꽃은 피었습니다

용재천사 - Ailes d'ange 2011. 3. 27. 19:15
728x90
올해도 봉숭아꽃은 피었습니다



 우리 집 장독대 밑에는 올해도 봉숭아 꽃이 만발했다. 누가 일부러 씨를 뿌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땅을 누가 눈 여겨 잘 보호해 준 것도 아닌데, 봄만 되면 작년 그 자리에 어김없이 붕숭아 새싹은 돋아난다. 그러면 사람들은 생각난 듯 "그래, 작년 여기에서 봉숭아 꽃이 피었었지"하며 그 새싹을 대충대충 가꾼다.

 

 시골 누구네 집을 가든 그 집 어딘가에 봉숭아꽃 몇 포기쯤은 피어있다. 동네 길을 가다 보면 길가 어딘가에 비좁은 틈에도 봉숭아꽃은 피어 사람들의 눈길을 잡는다.

 

 그렇게 누가 심고 가꾸지 않아도 해마다 그 자리에서 스스로 피어나는 집안의 꽃들이 있다. 봉숭아, 맨드라미, 분꽃들이 그런 꽃이다.

 

 별로 할 일도 없는 늦가을 쯤 사람들은 봉숭아 대나, 맨드라미 빈 꽃대를 뽑아서 두엄자리에 휙휙 던져 버린다. 그렇게 겨울 동안 잊고 지내다가 이듬해 봄이 오면 작년 그 자리에서 싹이 나오는 분꽃이나 맨드라미들은 또 사람들은 잡풀과 구별해서 가꾼다. 맨드라미는 그 붉은잎으로 부침개를 부쳐 먹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예쁨을 받았다. 싸움 시작 전 열 받은 장닭 벼슬같이 붉은 맨드라미 잎을 따서 썰어 쫑쫑 썬 매운 고추나 호박하고 섞거나, 아니면 맨드라미 붉은 잎 한 장씩을 넓적넓적하게 쫙 펴서 부침개를 뷔면 그 잎이 들어간 부침개는 참 고소하기가 그만이었다.

 

 담 밑이나, 장독대 밑, 아니면 독을 얹은 독과 독 사이 바위틈에 나서 자라 여름날 꽃을 피우는 봉숭아꽃은 많은 사람들에게 시를 짖게 했고 많은 가수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 민족의 한을 담은 노래(봉선화)는 언제 들어도 구슬프고 누시울이 붉어진다. 우리들의 역사가, 우리들의 삶이, 나의 인생이, 아니 인생 그 자체가 슬퍼서 어쩌면 조상들은 일제 식민지의 그 서럽고 억울한 일상을 달랬다. 사람들이 이 노래를 일제 식민지와 별 상관이 없다고해도(봉선화) 노래를 가만가만 부르면,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기차바퀴 소리가 들린다. 그 기차 짐칸에 봇 짐을 가슴에 품고 고향을 떠나는 우리네 조상들의 웅크린 모습이 어른거린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기나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우리 님은

     나를 반겨 놀았도다

 

 세상의 별 볼일 없는 곳, 그 누가 날마다 보아 주고 가꾸어 주는 것도 아닌데, 자기 스스로 자라 꽃을 피워 죽어서까지 어여쁜 사람들의 손톱 끝에 오래 오래 붉은 꽃물로 남아 있는 꽃, 봉숭아 꽃, 길을 가다가 어느 담 밑에 피어 있는 것을 언뜻 바라다보면, 애틋하고 예잔한 꽃, 어쩐지 정이 가는 꽃, 봉숭아꽃.

 

 알 수 없는 그리움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하루하루 하얀 손톱이 길어나고, 이 그리움이 다 자라 손톱에 봉숭아 빨간 물이 다 잘려 나가기전에 나는 그 그리움의 실체를 찾아가리라. 그렇게, 어떤 누님은 빨간 손톱이 다 자라 없어지기 전에 시집을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누님은 그 빨간 봉숭아 꽃물이 손톱에서 더 잘려 나갈 때까지도 그 그리움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 누님들이 그리움을 다 찾아 동네를 떠나고, 누이동생들도 그렇게 빨간 손톱을 깎다가 그 봉숭아 꽃물이 다 잘리기 전에 시집을 갔다. 그리고 이제 깨끗하게 손톱을 깎고 정성들여 꽃잎을 따서 고운 새끼손가락에 빨간 봉숭아 물을 들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마을엔, 그런 누이들이 하나도 없이 사라졌다.

 

 세월이 가고 그 누이들이 나이가 들어 동네를 찾아올 때 누이들의 손톱에는 열 손가락 모두 붉은 색, 혹은 또 다른 색의 매니큐어가 물들어져 있다. 그리움을 다 찾아 버렸는지, 세월이 그리움을 다 빼앗아 가버렸는지, 누이들은 그 누구도 장독 뒤에 피어 있는 봉숭아꽃을 거들떠 보지 않는다. 그 대신 울 밑에 피어있는 봉숭아꽃이라도 눈에 뜨이면 '건들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어쩌고 저쩌고하는 유행가를 흥얼거린다.

 

- 김 용 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