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시(詩) 가운데 「않은뱅이꽃의 노래」라는 시가 있다. 어느 날, 들에 핀 한 떨기의 조그만 앉은뱅이꽃이 양의 젖을 짜는 순진 무구한 시골 처녀의 발에 짓밟혀서 시들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앉은뱅이꽃은 조금도 그것을 서러워하지 않는다. 추잡하고 못된 사내의 손에 무참히 꺾이우지 않고 밝고 깨끗한 처녀에게 밟혔기 때문에 꽃으로 태어났던 보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의 상징을 좋아한다. 들에 핀 조그만 꽃 한 송이에도 꽃으로서의 보람, 생명으로 태어났던 보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람 있는 생(生)을 원한다. 누구나 보람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보람 있는 일생을 마치고 싶어한다. 우리 인생의 희열(喜悅)과 행복(幸福)을 주는 것은 진실로 보람이다. 화가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고 캔버스 앞에 설 때, 작곡가가 좋은 노래를 지으려고 전심 몰두할 때, 어머니가 자식의 성공과 장래를 위해서 밤낮으로 수고할 때,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큰 일 작은 일에 정성된 노력을 기울일 때,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낀다. 생의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고생이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쁨으로 변한다. 인간의 생(生)에 빛과 기쁨을 주는 것은 곧 보람이다. 보람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기쁨도 크다.
자기의 생에 보람을 못 느낄 때, 허무(虛無)의 감정과 의식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내가 하는 일이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절대로 인생의 허무주의자가 될 수 없다. 생활에 대해서 회의(懷疑)의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행복은 만인(萬人)의 원(願)이다. 행복에의 의지(意志)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지이다. 이것은 이론(理論)이 아니고 인생의 사실(事實)이다. 행복한 생을 원하거든 먼저 생의 보람을 찾아야 한다. 보람 있는 생을 살 때 꽃의 향기가 짝하듯이 행복이 저절로 따른다.
나는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때마다 위대한 철학자 칸트의 말을 언제나 연상한다. 칸트에 의하면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런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는 착한 사람이 행복하고 악한 사람이 불행한 것을 볼 때 그것이 당연한 인생의 질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악한 사람이 행복하고 착한 사람이 불행한 것을 볼 때 그것은 인생의 부당한 질서라고 생각한다. 어딘지 못마땅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양심(良心)의 요구다. 착한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자연이요, 또 필연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해서 또 인생에 대해서 정(情)을 붙이고 살아가는 것이요, 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악한 사람이 행복을 누리고 착한 사람이 불행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지옥의 질서다. 저주받은 사회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가 아니고 악마의 나라다. 우리는 의식하건 안 하건 인생과 세계의 도덕적 질서를 굳게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행복이란 단어는 인생의 사전에서 가장 큰 캐피털 레터로 쓰여진 말이다. 우리의 대화에 항상 오르내리고 우리의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와 무게와 의미를 차지하는 단어다. 행복은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서양 신화(神話)에 의하면 행복의 여신(女神)은 짖궂은 여신이다. 쫓아가면 도망한다. 냉정한 태도로 멀리하면 유혹하려고 든다. 단념하면 배후(背後)에서 사람을 조롱한다는 것이다. 행복의 여신은 이렇듯 다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행복의 여신은 쫓기에도 안 되었고, 안 쫓기에도 안 되었다. 쫓으면 달아나고 안 쫓으면 유혹하고 단념하면 조롱한다.
너무 행복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 행복에 개의치 않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려고 애쓰고, 또 인생의 보람을 위해서 정성스럽게 일하노라면 뜻밖에도 행복의 여신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행복의 길은 행복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일이다. 인생의 보람을 위해서 살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보람, 이것이 행복의 중요한 열쇠가 아닐까.
[2] 세 사람의 석공(石工) 20여 년 전에 배운 중학교 영어 교과서 삽화(揷話) 하나가 생각난다. 어떤 교회를 짓는데 세 사람의 석공이 와서 날마다 대리석을 조각한다.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느냐고 물은 즉, 세 사람의 대답이 각각 다르다. 첫째 사람은 험상궂은 얼굴에 불평 불만이 가득한 어조로, “죽지 못해서 이놈의 일을 하오.” 하고 대답한다. 둘째 사람은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돈 벌려고 이 일을 하오.” 그는 첫째 사람처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불평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고 별로 행복감과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셋째 사람은 평화로운 표정으로 만족스러운 대답을 한다.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대리석을 조각하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 삽화의 상징적 의미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사람은 저마다 저다운 마음의 안경을 쓰고 인생을 바라본다. 그 안경의 빛깔이 검고 흐린 사람도 있고 맑고 깨끗한 사람도 있다. 검은 안경을 쓰고 인생을 바라보느냐? 푸른 안경을 통해서 인생을 내다보느냐? 그것은 마음에 달린 문제다. 불평(不平)의 안경을 쓰고 인생을 내다보면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모두 불평 투성이요, 감사(感謝)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인생에서 축복하고 싶은 것이 한없이 많을 것이다. 똑같은 달을 바라보면서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혹은 슬프게 혹은 정답게 혹은 허무하게 느껴진다. 행복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육체(肉體)를 쓰고 사는 정신(精神)인 이상, 또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인 이상, 누구든지 먹고 살기 위한 의식주(衣食住)와 처자(妻子)와 친구와 명성(名聲)과 사회적 지위가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돈, 건강, 가정, 명성, 쾌락 등은 행복에 필요한 조건이다. 이런 조건을 떠나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곧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다는 것과 행복의 조건을 갖는다는 것과는 엄연히 구별해야 할 별개의 문제다. 집을 지으려면 돌과 나무와 흙이 필요하지만 그런 것을 갖추었다고 곧 집이 되는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의 논리다. 행복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행복감을 떠나서 행복이 달리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돈이 많고 명성이 높고 좋은 가정을 갖고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면서도 불행한 사람, 또 그와 반대로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별로 갖지 못하면서도 사실상 행복한 사람을 우리는 세상에서 가끔 본다. 전자(前者)의 불행은 어디서 유래하며 후자(後者)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 고 맹자는 말했다. 그러나 맹자는 다시, 선비는 항산(恒産)이 없어도 항심(恒心)이 있다고 단언(斷言)했다. 맹자의 ‘항산’이란 말을 ‘행복의 조건’이란 말로 바꾸고, ‘항심’이란 말을 행복이란 말로 옮겨 놓아도 별로 의미에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행복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그러나 선비는 행복의 조건을 못 갖추어도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맹자의 행복의 논리다. 행복의 조건이 행복의 객관적 요소라고 한다면, 행복감은 행복의 주관적 요소다. 행복은 이 두 가지 요소의 종합에 있다. 행복해질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가지면서도 행복해지지 못하는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또 행복해질 만한 조건은 별로 갖추지 못하면서도 행복을 누리는 비결은 무엇일까? 맹자의 표현을 빌려서 말한다면 항산이 없더라도 항심이 있을 수 있음을 어찌된 까닭일까? 그것은 요컨대 마음의 문제다. “사람은 자기의 결심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고 링컨은 말했다. 행복이 마음의 문제라고 한다면 마음의 어떠한 문제일까?
[3] 밀레의 만종(晩鐘)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밀레의 그림을 좋아했다. 보리 이삭을 줍는 그림도 좋았고, 씨 뿌리는 그림도 마음에 들었다. 어린 아기를 문턱에 앉히고 엄마가 아가에게 밥술을 떠 넣어 주는데 두 언니가 앞에 앉아서 동생을 귀여운 표정으로 지켜 보는 그림은 나의 어린 가슴에 행복의 이미지를 아로새겨 주었다. 어린 아이가 팔 벌린 엄마를 향해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그림은 인생의 사랑과 평화를 그대로 표현한 그림 같았다. 양(洋) 치는 목자(牧者)가 들에서도 기도하는 그림은 우리에게 경건(敬虔)을 가르쳐 준다.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서 밀레의 그림을 직접 눈앞에 보았을 때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가슴 속에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서 밀레의 「만종(晩鐘)」의 그림 앞에 섰을 때, 나는 인생의 시(詩)와 진실(眞實)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 밀레는 렘브란트나 고흐, 루벤스나 세잔느 같은 대가(大家)에 비하면 이류(二流)의 화가밖에 안 된다. 그러나 나는 밀레 그림을 좋아한다. 그 소박성이 좋고, 그 진실성이 마음에 든다. 밀레 그림의 테마가 더욱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밀레는 일생 동안 일하는 농부들을 그의 화제(畵題)로 삼았다. 동리 사람들이 푼푼이 모아 준 노자(路資)로 파리에 가서 그림 공부를 하였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농사를 지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밀레는 위대한 화가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밀레의 소박하고 정직한 그림은 우리에게 인생의 시와 진실의 세계를 가르쳐 준다. 반다이크는 밀레의 ‘만종’을 평하여, “사랑과 노동(勞動)과 신앙(神仰)을 그린 인생의 성화(聖畵)” 라고 했다. 나는 ‘만종’에서 행복의 메타포를 발견한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동물은 아니다.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나를 사랑해 주는 자가 필요한 동시에 내가 사랑할 생명이 필요하다. 사랑이 없는 생은 결코 행복한 생이 아니다. 사랑은 행복의 열쇠다. 사랑하는 기쁨과 사랑을 받는 보람을 가질 때 우리는 지상(地上)에 인간으로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싶고 축복하고 싶어진다. 건강해서 일하는 기쁨은 행복에 없지 못할 요소다. 남자는 사업(事業)에 살고 여자는 애정(愛情)에 산다. 일은 우리에게 벗을 주고 건강을 주고 삶의 보람을 준다. 온 정열을 쏟을 수 있는 일을 인생에서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 다시 없는 행복자(幸福者)다.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하나의 굳건한 믿음이 필요하다. 종교(宗敎)의 신앙도 좋고 사상(思想)에 대한 신념도 좋다. 우리의 생을 의지할 든든한 기둥이 필요하다. 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긴 다리 위에서 우리는 뜻하지 않는 폭풍을 만나는 수도 있고, 불의(不意)의 비극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기의 십자가(十字架)를 짊어지고 인생을 살아간다. 어떤 이는 가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어떤 이는 병(病)의 십자가를 짊어진다. 생(生)의 십자가를 굳건히 짊어지려면 마음의 단단한 준비가 필요하다. 나의 분(分)을 알고 나의 분을 지켜서 인생에 지나친 욕심을 갖지 않은 것이 슬기롭다. 지족(知足)은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의 하나다. 자기의 분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행복에 담을 쌓는 사람이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 행복을 원하거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기르고 배워야 한다. 사랑과 노동과 신앙, 인생의 참된 행복은 그런 데 있지 아니할까. - 안병욱(安秉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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